스페인 기업가이며 EoC 개척자 파코 토로(Paco Toro)와의 인터뷰
- EoC Korea
- 3월 12일
- 7분 분량

삶의 섬광들과 뿌리들 Flashes of Life & Roots 시리즈 다섯 번째 영상 인터뷰: 파코 토로(Paco Toro)
인터뷰 진행자: 사라 마리아 알바레스 모이세스(Sara Maria Alvarez Moises)
파코: 저는 (스페인) 하엔(Jaen) 출신의 파코 토로입니다. 하엔 출신이라고 한 것은 제가 이곳에서 살게 된 지 52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스페인의 카디즈(Cadiz)와 세비야(Sevilla), 그라나다(Granada)에서 살다가, 하엔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롤라(Lola)와 결혼해서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째 딸은 만 53세이고, 막내는 만 39세입니다.
제가 하엔에 도착한 것은 1972년도였고, 당시에는 딸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만 한 살이었고, 둘째는 이제 막 태어났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기업에서의 이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회사가 성장하고 있고, 현재 농업 관련 엔지니어들 6명과 생물학자 1명, 인사 담당 부서 직원들, 운송 관련 부서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회사에서 조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몇 년 동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모든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많은 기업들이 직원 수를 감축하는 등의 방식을 취하곤 했지만 저는 새 기술직 직원들을 채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계속 발전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사라: 1972년에 회사를 설립하셨다고 했지요. EoC가 시작되기 전이었는데, 이 기업이 당시 어떠했는지, 그리고 기업가로서 이 기업을 통해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파코: 네. 사실 저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몇 가지 바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좀 더 오래전의 이야기부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만 22세였을 때, 농부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농장 일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몹시 아프셔서 쇠약해지신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돌보실 시간을 좀 더 마련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거였습니다. 이것은 1969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1970년 초에 결혼을 했고, 1971년 9월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첫째 딸은 이미 태어나 있었고, 제 아내 롤라는 둘째 딸을 임신 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셨고, 그래서 제가 농장에 일하러 갈 때면, 아버지도 저하고 함께 일하러 오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시골분이셔서 농장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아버지와 저, 두 사람이 다 그곳에서 일하는 것은 효용성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곳에 꼭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나야"라고 생각했고, 제가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농장 일을 했을 때 좀 더 현대적인 기술들과 식물 위생 관련 제품들 등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생산량이 매우 늘어났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회사에서, 이 제품들을 하엔 지방에 배포하는 역할을 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회사와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서로 합의접을 찾게 되어 제가 이곳 하엔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엔 지방에 대해 잘 몰랐고, 이곳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회사에서 판매할 제품들을 저에게 맡겨 주곤 했기 때문에, 제가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품 판매를 하고 나서 그 회사에 제품 대금을 지불하는 식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전에는 그러한 영업을 해본 적이 없고, 판매 관련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초기 몇 년간은 힘들었고,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지만, 그런 대로 잘 된 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는 매사를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해야 하고, 그분의 섭리에 맡겨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끼아라 루빅이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를 출범시키셨는데, 저는 이에 앞서 저에게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끼아라가 EoC를 출범시키시기 1년 전에, 계속해서 제 머릿속에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을 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신 일이었지요.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저는 왜 그때 이런 생각이 제게 계속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논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더 큰 기적을 일으키셔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어떤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 혼인잔치에서)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작은 기적 하나를 일으키셨을 뿐이고,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거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욱이 그것은 그분이 일으키신 첫 번째 기적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저는 혼잣말로 '그럼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신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도 몸소 돌보아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일상생활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끼아라가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를 출범시키셨을 때, 저는 크나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당시 제가 가졌던 느낌은 다음과 같이 했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내 생각에는 이제 마리아 사업회가 (곧, 포콜라레운동이) 완전해진 것 같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의미는 이 시점에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매우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문화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위대하신 것은 사실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끼아라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빈민촌 파벨라스(favelas)에서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를 출범시키셨을 때, 저는 그것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그리스도교는 자선을 베푸는 일이나 교육 사업을 하는 것, 병원을 세워 의료 사업을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런 것들도 매우 긍정적인 활동들이지만, 노동이나 경제와 관련해서 필요한 부분들은 다소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종종 도움을 받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 사람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종종 다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곤 해서,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여러 (자선 활동의) 옵션들 속에 항상 형제애가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물론 많은 자선 활동들에서는 형제애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상파울루에서는 매춘과 문맹, 마약과 알콜 중독, 극심한 빈곤 등 모든 유형의 필요성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oC는 노동과 일자리에 집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자, 그 이유는 한 사람에게 존엄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사람, 출근할 수 있는 사람은 자존감을 높이게 되고, 그 사람이 타고난 능력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노력을 더 잘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매우 어려워집니다. 파벨라스 빈민촌에서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비전을 갖고서 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영성적인 경험을 매일의 일상생활의 현실과 연결해서 적용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라: 당신께서는 서로 다른 문화권,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형제애를 경험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칠레, 볼리비아에서 그랬고, 아프리카 대륙의 몇몇 나라들에서도 그러셨지요. 볼리비아에서 형제애를 경험하셨던 것이 어떻게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의 정신으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파코: 그게 말이지요... 정말로 여러 여건들이 마련되고 나서 제가 그곳에 가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를 함께 나누게 되었지요.
그것은 하나의 은총이지요, 그렇지요?
볼리비아에 가기 전에 칠레에 먼저 갔었는데, 올리브 문제와 관련해서 칠레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왜냐하면 이곳 하엔 지방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올리브 나무들이 있는 곳 중에 한 곳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볼리비아에 갔을 때, 저의 열망과 계획에 대해 끼아라께 편지를 썼고, 끼아라는 제가 볼리비아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포콜라레운동 책임자와 이야기해보라고 답하셨습니다.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분들이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능력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전통 문화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여러분 보세요, 이 사람들은 예전에는, 그러니까 2~3세기 전에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고, 그 공동체에서는 경제가 공동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하되, 모두가 그 노동에 동참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경제(personal economy)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서구의 개체주의(personalism)적인 새로운 경제 체계가 도달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그 마이크로칩(문화적인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할아버지와 부모와 친구들 모두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지요.
각 문화는 자신만의 접근법을 갖고 있습니다. EoC 기업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곤 했는데, 당시에 저는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 안에서 사람들이 내어주는 것들의 상당 부분이 어느 모로는 너무 도움을 주는 데에만 그치는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무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도움을 주는 데에만 그치는 방식은 이미 알려져 있는 방식, 새로운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칠레와 볼리바아의 포콜라레운동 책임자와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로마에서 EoC에 전해주곤 했던 것이 볼리비아에서는 직접적으로 적용될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 책임자는 (저의 제안에) 찬성했고, 그래서 저를 그곳 포콜라레와 접촉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몇 달 후에 제 아내 롤라와 저는 볼리비아에 갔고,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보고자 했습니다.
저희 역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고, 그곳 사람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치 우리가 어떤 대단한 사람들인 것처럼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놀랐겠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관건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우리가 알로 있던 EoC 기업가들과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브라질에는 그런 기업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볼리비아에는 EoC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뒤이어, 기업들을 어떻게 설립할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젝트들을 제안하고, 그것들을 매우 잘 분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기업가 정신이 적은 문화의 사람들이 만일 그들의 기업이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는 평범에서 벗어난 일들에 휘말리게 된 것이기 때문에 두 배의 실패를 겪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업 활동을 잘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학습을 더 하는 것이 필요할지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 경우, 근로자들이 의료 시스템 등의 지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 잘은 모르지만 - 돈을 그냥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았고, 빌려주되, 무이자로 빌려주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정도의 기간 내에 돈을 갚아야 하고, 돈을 빌려가는 사람들이 갚을 능력이 있는지 제가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돈을 빌려가는 사람들이 굴욕감을 느껴서는 안되겠지요. 그것을 나중에 갚는 것을 전제로 하나의 도움을 주는 것이고, 이런 조건에 우리는 서로 만족해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형제애 안에서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사라: 물론이지요. 그럼 이 지점에서 질문드립니다. 두 분(파코와 아내 롤라)은 이러한 문화적 중재 역할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그러니까 두 분이 어느 시점에 위원회 하나를 설립했다고 아까 저에게 말씀하셨던 점을 생각하면서 이 질문을 드립니다. 그 위원회가 어떠했습니까?
파코: 제 기억으로는 그 이듬해에, 그 위원회가 그동안 어떻게 발전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제안 전체가 저에게 제시되었는데, 그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들에 대해 질문을 하는 방식이었고, 기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응답하고, 한 기업의 운영 문제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연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홉 개의 기업이 설립되었고, 20여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라: 파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EoC와 진정한 생태 보호(환경 보호)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파코: 자연스러운 적용의 문제라고 봅니다. 여기에서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것들은 모든 것에 대한 존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할 수 없는 것은,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아기에게는 귀여워해주는 것 외에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농업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어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해로운 것들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는 "엄청난 균형 감각의 접근법, 모든 존재들 서로 간의 환대, 사람들 사이에 환대"라는 접근법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자연도 포함됩니다.
잠시 뒤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생태 환경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플라스틱 섬들이 여전히 있고, 그 섬들을 전부 합치면, 면적이 멕시코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플라스틱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요.
우리는 언행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은 무성하게 많지만 실천은 적으니까요.
생태환경 보호라는 말은 진정한 생태환경 보호를 위해서 보다는 정치적 압력으로서 더 많이 사용되곤 합니다.
사라: EoC기업가가 되는 것을 선택한 이후에 주된 도전들이 무엇이었는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파코: 저는 도전들이라고 하기보다는 결실들이라고 하고 싶네요.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내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일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고요. 그렇지요? 그 후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걱정했던 일들이 해결된 것을 다시 보게 되어요.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만족스럽지요.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함께 일하는 사람들 간의 조화가 중요해요. 제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셨는데, 제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기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좋아요. 저는 "글쎄요, 저한테 달려 있지 않아요..."라고 말했어요. 그런 기쁜 분위기는 우리가 일을 정확히 제대로 하고자 할 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늘 우리는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곤 하지요.
예를 들어서, <나눔과 친교의 경제, EoC>가 태어났을 때, 저는 마치 한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그리면서, 자아가 실현되었다고 느끼는 것처럼, 혹은 한 작곡가가 뛰어난 곡을 만들어냈을 때 자아실현이 된 것으로 느끼듯이, 그렇게 느꼈어요. 그렇지요?
저는 혼잣말로 "나는 만족스럽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어요. 이제 저는 만 73세가 다 된 나이에도 이 회사의 소유주인데, 사실 이 회사는 이미 더이상 저의 소유도 아니에요. 회사 일부를 이 회사의 한 부서에서 일하는 제 아들에게 매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유는 잘 몰라도 제가 매우 가까이에 있다고 느껴요.
사라: 너무 감사합니다, 파코, 당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서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 주셔서요.
파코: 제가 여러분에게 감사하지요.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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