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사회적경제에서 일하는 의미의 재발견



사회적경제계界는 마치 럭비(rugby) 경기에서처럼 뒤로 갈 줄 알아야 앞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경제의 뿌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제3섹터(the third sector)*는 아직도 필요한가?”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의) 『비타(Vita)』 잡지* 12월호에 실린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글을 소개합니다.



용어 관련 안내 (한국어판 편집부)

*제1섹터는 국가 또는 지방공공단체가 공공의 목적으로 경영하는 공기업들을, 제2섹터는 민간 기업들이 영리목적으로 행하는 사업들을 각각 뜻하고, 제3섹터는 이 두 부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제3의 부문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본래 제3섹터(the third sector)는 영어에서 ‘비영리 기업’을 뜻했고, 특히 영국에서 NPO(Non Profit Organization, 비영리 조직, 비영리 민간단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현재 제3섹터는 시민참여로 이루어지는 공익 활동을 통해 정부와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는 비영리단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공동체, 시민단체, NGO (NPO), 공익법인 등을 모두 포함하는 부문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자 루이지노 브루니는 이 글에서 제3섹터를 특히 사회적경제와 사회적기업, 시민경제와 EoC 등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제3섹터를 말할 때, 민간 부문이 가진 풍부한 자본과 우수한 기술 및 정보를 공공부문에 도입하여 공동출자 형식으로 행하는 지역개발사업을 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글에서의 ‘제3섹터’는 이 맥락과는 다소 다른 의미라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비타(Vita)』 잡지는 이탈리아에서 비영리 부문을 대변하기 위해 1994년 창간된 잡지로서, 그동안 멀티미디어 컨텐츠 회사로 성장했고, 현재 주로 사회적기업들과 환경보호단체들 및 자선단체들을 위한 마케팅 컨설팅, 컨텐츠 제작 사업, 디지털 솔루션 등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현재 『비타(Vita)』는 이탈리아에서 66개 관련 연합회와 52,000개의 관련 단체들과 제휴하고 있고, 유럽 전역의 비영리 부문과 시민사회에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는 미디어 컨텐츠 등을 제공하는 『비타 인터내셔널(Vita International)』 웹사이트와 아프리카 뉴스 웹사이트인 『아프론라인(Afronline)』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타(Vita)』는 현재 벨기에의 브뤼셀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뉴스룸을 두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저자가 이탈리아 사회적경제와 사회적기업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따라서 국내 현실과는 다른 맥락과 환경을 전제로 합니다만, 국내 EoC와 사회적기업들, 사회적경제에서도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있는 듯해 소개합니다.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글

2019년 12월 24일 작성

『비타(Vita)』 웹사이트에 2019년 12월 26일 게재


사회적 경제에서 일자리는 깨끗한 물, 생수의 역할을 합니다. 이상(理想)들이 있을 때, 합당한 동기부여들이 있을 때, 마치 맑은 강물에 송어가 모이듯, 일자리는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노동과 소명(깨끗한 물),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이탈리아의 특수한 현실 안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리를 위한”(for profit) 세계와 “비영리”(non profit)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 마르틴 루터가 말하는 두 개의 왕국에 대한 이론에서 비롯된, 앵글로색슨 문화의 맥락에서 생긴 – 대립의 구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 같은 대립의 구도는 중소기업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중요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경제사와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사실 영리(profit)와 비영리(non profit)로 구분하는 것은 이태리식 기업 모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태리식 기업 모델은 시민경제(economia civile)라는 중요한 전통에서 비롯되는 훨씬 더 혼혈적인 시스템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태리식 모델은 혼혈적인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이른바 비영리(non profit) 부문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얼핏 보면 영리만 추구하는(for profit)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부문에서도 그러합니다. 바로 이로 인해, 공예품을 생산하는 한 업체(예를 들어 10명의 직원을 둔 한 유한책임회사)와 한 다국적 기업 사이의 유사성보다는, 그 공예품 생산업체와 한 협동조합 사이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영리’(non profit) 부문은 역사에 연결되어 있는 각 지역의 주체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협동조합이든, 공예품 생산업체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태리식 시스템에서는 서류상으로는 영리를 추구하는(for profit) 기업들 역시, 영리를 넘어선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도 움직이곤 합니다. 노동과 노동의 의미는 척박한 대립 구도에서보다는 이와 같은 혼혈 모델에서 더 추구되어야 합니다.



“행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제3섹터에서의 노동의 의미”라는 주제와 그 노동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기”라는 주제는 이와 같은 맥락 속에 다시금 자리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 의미의 문제를, 새로운 서술 방식의 차원에서도 다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동기로 인해, 이태리식 사회적경제가 바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진정한 기적을 이루어낸 것일까요?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소명 의식’(vocation)을 지닌, 양질(良質)의 인재들을 매료시켜 사회적경제에로 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일자리들”을 제공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태리식 사회적경제의 첫 번째 자산은 바로 인적자본(人的資本, human capital)이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정치가 위기를 맞이했던 시기에 그러했습니다. 198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정치가 그 이상성(理想性, ideality)을 상실해가고 있던 가운데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우수한 젊은이들은 이태리식 사회적경제에 매료되었고, 그 결실들은 이제 모든 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나 직업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시민사회계界에 투신하여 그들의 일을 통해 기적을 일구어낸 사례들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협동조합을 고안해낸 세대는 이상성(理想性, ideality)과 인간적인 재능들을 갖추고, 소명 의식을 지닌 사람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사회적협동조합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제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많고 많은, 양질(良質)의 인적 자원들이 정치에 투신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계界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일은 의미 자체였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기 위해 우리는 ‘파시즘 이후’(post-fascism) 시기로 돌아가, 젊은 세대들 전체가 강렬한 이상성(理想性, ideality)과 열정으로 정치와 시민사회를 새롭게 건설하고자 주력했던 때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무언가 이와 유사한 현상이 시민경제계와 사회적경제계에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진정한 소명 의식을 지닌 이들과 진정한 재능을 지닌 이들을 매료시키고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본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에 다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사한 시기를 다시 개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발전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에 대한 동기 부여와 업무 능력을 통해서 가능해지는데, 이는 직업 능력의 면에서, 그리고 인성 면에서 뛰어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사회적경제계界는 “인적자본 집약적”이고도 “동기 부여(motivation) 집약적”인 분야입니다. 노동의 문제는 모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곧, 양질(良質)의 인재들이 없다면, 사회적경제를 혁신할 수도, 발전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모든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 하고 있는 어려운 과제는 바로 이것, 곧 소명 의식을 지닌 이들을 매료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단지 앵글로색슨(Anglo-Saxon) 토양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 자본주의적(capitalistic)인 이야기 서술 방식을 통해서는 – 그것이 사업에 관한 것이든, 일에 관한 것이든 – 소명 의식을 지닌 이들을 매료시킬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고전적인 ‘비영리’(non profit)에 관한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긍정적인 이야기이지,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영리(非營利, non profit)라는 말에서 ‘비’(非, non)라는 접두사는 본래 무언가를 생성해내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데 비해, 이 섹터는 그 존재 목적상 늘 무언가를 생성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의 의미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도, ‘시민 경제’(economia civile)가 무엇인지, 또 [시민 사회에서 공동선(共同善)과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자율을 존중하는, 이른바] ‘사회적 사적私的 부문’(privato sociale)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노동과 기업, 소명의식, 그리고 이상(理想)들을 상호 연결시켜주는 새롭고도 위대한 시기를 다시 열 수 있다는 희망이, 바로 이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해 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많은 것들을 사랑하지만, 그중에 젊은이들이 특히 더 사랑하는 것은 위대한 역사들입니다. 젊은이들은 위대한 역사에 참여하여 그 한 부분이 되기 위해 그들의 삶을 소진합니다.


복수형(複數形) 다원적 패러다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두 번째 포인트는 우리가 제3섹터의 개혁의 정신들 중 하나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경제를 주류 경제 패러다임에 맞추어 균질화시키고 획일화시키는 길로 들어서서는 안 됩니다. 만일 사회적경제가 (주류 경제와) 똑같은 비즈니스 문화로써, 본질적으로 (주류 경제의 요구와는) 다른 요구들에 대응하려는 하나의 방식이 되어버릴 경우, 그 도전은 이미 패배한 셈입니다. “사업은 사업이다(business is business).”라고 말하는 앵글로색슨식 모델은 묵과默過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생각은 현재 이탈리아에서도 묵인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떤 특정 경제를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 경제는 20세기에 자신의 고유성과 훌륭한 자질, 이상理想과 노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그 능력으로써 많은 영역에 걸쳐 풍요를 이룩했던 바로 그 경제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영리’(non profit) 사업을 어떤 특별한 ‘비즈니스’로 변화시키려 하는 주류 경제, 혹은 자신과 동일한 군대에 속한 어떤 특수한 부대로 변화시키려는 주류 경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패러다임, 곧 복수형(複數形) 다원적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경제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은 맞지 않습니다. 이태리식 사회적경제는 이와 같은 다원성(多元性, plurality)이야말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요인이자, 일자리를 창출하는 요인임을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새롭게 생기는 일자리는 이상성(理想性, ideality)이 수익을 낼 수 있게 되면서 창출해내는 일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부족한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일자리를 만드는 데 적용되는 이와 같은 이상성(理想性, ideality)입니다. 그런데도 만일 사업(business)은 단지 하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 사업을 하는 방식은 단지 하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이 묵인된다면, 우리는 우리 세계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자리 창출은 기술, 곧 어떤 특정 분야에 적용된 기술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벌어졌던 현상으로부터 다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던 이 현상에 대해 사회적경제계界 스스로가 아직 완전히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같은 인식을 획득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 것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는, 독특하고도 유일한 방식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업 방식은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민 인본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마치 럭비(rugby) 경기에서처럼, 사회적경제계界는 뒤로 갈 줄 알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뿌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어 원본 기사 웹사이트:



RECENT POS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