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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소명


어떤 소명 때문에 기업가가 된 이들이 있다. 이들은 예컨대 어떤 위기나 질병, 우울증 등을 겪고 있던 어느 날, 누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기에, 기업가가 된 것이다.


2020년 2월 12일 《치타누오바(Città Nuova)지誌》에 게재

2020년 2월 20일 『모두를 위한 경제, EoC』 국제 웹사이트에 게시

“제가 어렸을 때 한번은 저희 아버지가 공장에 20분 늦게 도착하셨어요. 제가 천식 발작을 일으켜서 저를 병원에 데리고 가셔야 했기 때문이었죠. 아버지는 20분 지각으로 4시간의 시급을 받지 못하셨어요. 그때 제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끓어올랐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르익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화’였을 수도 있고 ‘고통’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날이 제 선택에 결정적인 날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 선택이란, 여러 해가 지난 후 제가 기업을 설립하면서 했던 선택입니다. 즉, 그날 제가 보고 겪었던 그 ‘무언가’가 더 이상 다른 어린이들이나 부모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기업가인 프란치스코가 들려준 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곧, 여러 진정한 기업가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많은 기업가들의 삶의 스토리들을 찾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프란치스코의 경험과 비슷한 사건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은 어떤 고통이나 특별한 경험을 한 후에 기업을 만들게 된다. 때로는 단지 자신의 가족 기업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기업가는 어렸을 때부터 그 가족 기업에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숙제를 하곤 하면서 자랐을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부모님은 그 가족 기업, 곧 상점이나 식당, 혹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그들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기업가는, 자신의 부모님이 그 가족 기업의 어려운 순간에도 회사나 가게 문을 닫지 않기 위해, 또 한 가정의 가장을 해고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우는 모습과 서로 다투는 모습, 또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이는 그 기업가가 그 가족 기업에서 단지 살과 피만을, 단지 삶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삶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는 자라면서 그 가족 기업의 사업을 물려받아 계속 이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가족 기업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세대의 소명으로 넘어가는 경우에, 그 기업의 근원에 반드시 언제나 어떤 ‘소명’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속에서 자신에 대한 어떤 부르심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 곧 어떤 소명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진정 경이롭고도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친구가 해준 말을 듣고, 또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듣고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했던 경험과 똑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매우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때로는 기업이 태어나기 전이 아니라, 태어난 후에 부르심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만남을 통해, 생겨난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가운데에 기업이 태어날 때도 있다. 이 경우도 어떤 특정한 소명은 없었다고 하겠다. 때로는 이런 사업 기회들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 인간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재화와 일자리, 급여와 부富를 창출하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실재하는 많은 기업들이 이렇게 태어났으며, 몇몇 기업들은 시작부터 좋은 기업으로 태어나고, 어떤 기업들은 나중에 그런 기업이 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어떤 설욕의 기회로 삼거나 도전을 하기 위해, 심지어 일종의 복수를 하기 위해 기업들이 태어나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회사의 사장이 직원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가운데에, 그 직원들 중 일부가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해 ‘우리는 적어도 당신만큼은 똑똑하다’는 것을 그 사장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기업들은 좀처럼 성공하기 어렵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매우 흔하지만) 시장이나 경제에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성장하는 기업가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부富나 재능을 자기 자신의 성장의 기회이자, 미래의 부富를 위한 기회로 보아야 한다. 질투와 시기는 절대로 미덕이 아니며, 시장(市場)의 미덕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어떤 소명이나 부르심으로 인해 태어나는 기업가들도 있다. 이들은 어느 날, 예컨대 어떤 위기나 질병, 우울증, 혹은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통해, 또는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새장에 갇힌 듯 느끼며 불안 속에 지내다가, 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비록 그들에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인 믿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확실히 그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 이 세상에는 단지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소명을 지닌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한 협동조합이나 어떤 협회, 혹은 한 기업을 살리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경제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경제’이기도 함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만일 자신이 이 같은 부르심과 소명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지 않는다면, 이후에 자신의 삶이 허무하게 시들어 갈 것임을 미리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소명에 응답했다.


경제는 이 모든 형태의 기업가들, 곧 이러한 전형적인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명의 경제’가 없으면 누룩이 없는 셈인데도, 시장의 빵은 언제나 이런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이 목소리가 매일 아침 계속해서 새로운 기업가들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만날 때는 언제나 축제의 시간이다. 우리가, 그들이 그런 소명을 받은 사람들임을 깨닫고 인정할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그들에게, 또한 모두에게 축제의 시간인 것이다. 공동선(共同善, the common good)은 성인(聖人)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기업가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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