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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 위기에 처한 경제와 덕德 2

다음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로마 룸사 대학 경제학과)가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에 경제와 덕德에 대해 주제별로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이태리어 원본 제목은 Fidarsi di uno sconosciuto)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2장 희망 _ 보물창고


희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고상한 단어가 그러하듯이, 마치 세기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문명 위에 또 다른 문명이 쌓여 겹겹이 층을 이루며 이룩된 유서 깊은 도시와도 흡사하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희망이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Pandora 상자에 들어 있는 희망이 바로 이런 부류의 희망으로서 덕德이 아니다. 이는 바오로 성인이 ‘헛된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흔히 권력자들이 이런 헛된 희망을 내세우곤 한다. 즉, 권력자들은 종종 국민들에게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하면서, 좀 더 나은 미래를 내다보며 희망을 갖자고 말하곤 한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요행을 바라는 식의 ‘희망’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행복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채, 그저 운명 또는 국가로부터 구제의 손길이 도달하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희망의 두 번째 지층地層 내지 수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부터가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이다. 이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자세로서, 조만간 현재보다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희망할 만한 진정한 이유들을 발견하도록 해 주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해 준다. 이 희망은 과거의 세대들이 그들의 자녀들과 손주들을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오늘 비록 재산이나 권리 면에서 초라하고 검소한 삶을 살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버티며 극복해 나가도록 밀어준 희망이다. 그들은 그 노고와 눈물 속에서도 장차 후손들이 받게 될 졸업장과 학위, 집, 지금과는 다른, 덜 힘든 노동과 새로운 직업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원의 희망에 도달하게 되면 이 희망은 장려壯麗하고 아름다운 고대 도시의 흔적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자기 자녀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자녀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고 목숨까지 바치며 투쟁한 사람들의 희망이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희망을 매일의 삶 속에서 연습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특히 서로 함께 이 ‘희망希望’의 불을 다시 켜야 한다. 이로써 정치, 시장市場, 기업이라고 하는 곳들이 더 이상은 ‘절絶-망望’의 장소가 되지 않도록 새 출발을 해야 한다.


희망이라는 덕德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사례들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미디어를 통해서도 알려야 한다. 시민사회의 절망이 전염되듯이, 희망도 전염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 형태의 희망은 연습과 훈련, 노력을 통해 이르는 덕德과는 다르다. 이 희망은 선물, 무상無償, 카리스charis, 곧 은총이다. 마치 보물창고를 만난 것과 같다. 멀리 떠나간 친구를 이제나 저제나 애타게 기다리는데, 어느 날 마침내 갑자기 그가 실제로 돌아오는 것과도 같다. 이 희망과 ‘기다림’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 두 나라 언어에서는 ‘희망하다’와 ‘기다리다’를 esperar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무언가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온갖 인간의 지혜는 ‘기다린다’와 ‘희망한다’는 두 마디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이는 ‘희망’의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위중한 질병을 선고받거나 크게 배신을 당한 후, 또는 끝없는 고독을 살고 난 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영혼 안에 차츰 무언가 감미로운 것이 느껴지고, 미풍微風처럼, 산들바람처럼 상쾌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을 위로하며 속이는 ‘자기自己 -기만欺瞞’이 아니라, 절망을 넘어, 희망할 수 있는 힘이 다시 생겨났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파산으로 법정에 장부를 넘기고, 거듭 말뿐인 은행의 신용 대부貸付 약속에 끝없이 실망하고, 서른 번째 구직 면접을 하면서 직장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을 때, 비록 눈물이 여전히 앞을 가려도, 마음속에는 희망이 다시 피어난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선사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달음질과 투쟁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 우리가 이런 희망을 낳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이 때문에 ‘선물’인 것이다. 이 땅 위에서 이 ‘네 번째 희망’(또는 몇 번째라고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이 희망)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러할 것이다. 바로 이런 희망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근로자, 기업인, 사회적 협동조합의 조합원, 정치인, 공무원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출처: https://eoc-rg.tistory.com/3 [EoC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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