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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 위기에 처한 경제와 덕德 3

다음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로마 룸사 대학 경제학과)가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에 경제와 덕德에 대해 주제별로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이태리어 원본 제목은 Fidarsi di uno sconosciuto)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3장 아가페 _ 그 위대한 새벽


상호성相互性은 인간이 지닌 사회성의 매우 귀한 법칙이다. 정치적인 동물의 DNA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서로 엮인 복합체로 이루어진 프로펠러이다. 인간의 사랑도 그 첫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상호성의 사건이다. 종종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 땅을 떠나며 사랑하는 누군가의 손을 꼭 쥐곤 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도 사랑하는, 사랑의 이 같은 상호성의 측면을 인류의 여러 문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단어를 통해 표현해왔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진 단어가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인데, 둘 다 공통적으로 상호성, 즉 상대의 응답에 대한 근본적인 필요성을 지닌다. 에로스는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일대일의 상호성이다. 필리아philia는 오늘날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개념에 흡사한 말인데, 상대가 응답을 하지 않더라도 참으며,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대한 계산만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리아’적的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은 아니다. 상대가 자신의 비非상호성으로써, 더 이상 나의 친구로 남아 있고 싶지 않다는 점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할 때, ‘필리아’적的인 사랑도 멈추기 때문이다. 사랑의 또 다른 한 차원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하나의 단어를 찾아낼 필요가 생겼다. 이 새로운 단어가 아가페agape였다.


아가페는 모든 사람의 인격의 본질 안에 현존하며 잠재력을 지닌 하나의 차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아가페는 비非에로스, 또는 비非필리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을 충만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아가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에 무상성無償性이라고 하는 그 차원을 선사해 주는 것이 바로 아가페이며, 아가페가 없다면 덕목들은 그저 가벼운 이기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가페라는 말을 번역하면서 카리타스charitas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는 그리스어 단어인 카리스charis, 곧 은총, 무상성無償性을 상기시켜 준다. 카리스charis가 없이는 아가페도 없고, 아가페가 없이는 카리스도 없다. 아가페는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아가페’라는 사랑의 형태는 경제적이고 시민사회적인 행위와 변화의 크나큰 힘이기도 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선익善益을 위해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서 아가페는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페는 다른 사람들의 상호성에 의지할 수 없는 상태로, 어떤 운동단체나 협동조합을 시작하는 사람이나 창설자들의 전형적인 사랑이다. 여기서는 오랜 고독 속에 강인함과 끈기가 요구된다.


아가페는 자신의 사랑이 사랑받지 못하여 그 사랑의 진전이 멈추게 되는 시점에도 속상해하지 않는다. 아가페적인 상호성의 충만함은 A는 B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B는 C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식으로,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도 표현된다. 이는 아가페의 이행성移行性, transitivity으로서 필리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에로스에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같은 <제3자>의 차원, 열려 있음의 차원이, 아가페를 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한 자녀를 향한 모성애와 부성애조차도, 【A =» B, B =» A】라는 관계에서 소진되어 버리고, 【B =» C …】라는 차원은 없다면, 근친상간적인 사랑이나 나르시시즘narcissism적的인 사랑의 모든 유혹을 극복하는 아가페적인 사랑, 즉 성숙하고 충만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상호성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상호성이 필요한 점, 상대의 응답이 없을 때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점은 아가페로 하여금 상처를 받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비옥한 인간관계의 경험이 되도록 해 준다. 아가페는 지극히 비옥한 상처이다. 다름 아닌 아가페가 신성한 위계 제도와 신분 계급을 타파해 주고, 권력의 갖가지 유혹을 물리쳐 주는 것이다. 아가페는 모든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이는 아가페가 해악을 받고 나서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는 용서의 한 유형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가페의 용서는 에로스의 용서나 필리아의 용서와는 달리, 치명적인 상처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상처를 치유할 능력, 또한 그 상처가 부활의 새벽이 되게 할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사文化史를 가로질러온 하나의 명제가 있다. 아가페는 시민사회적인 사랑의 한 형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상처받기 쉬운 아가페의 특성으로 인해, 신중하지 못한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아가페는 그저 가정생활에서나 영적인 삶에서만, 또는 아마도 자원봉사 활동에서나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고, 광장이나 기업에서는 우리가 에로스(인센티브[incentive])나, 기껏해야 필리아를 명단에 올리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아가페로 출발했다가 초기의 상처들에 직면해서 결국 매우 위계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어버린 그 많은 공동체들의 역사이다. 또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가, 이후에는 초기의 실패들로 말미암아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문을 닫아걸었던 경험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는 이 같은 후퇴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퇴보들이 아가페의 시민사회적인 가치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며, 이 때문에 우리는 정치와 기업, 노동에도 ‘덜’이 아니라 ‘더’ 많이 아가페가 깃들게 해야 할 것이다. 아가페가 인간의 역사에 출현할 때마다, 짧은 시간, 짧아도 너무 짧은 시간 동안에만 역사에 머무를 때조차도, 결코 세상을 그 전의 모습으로 그냥 버려두지는 않는다. 아가페는 언제나 ‘인간다움’의 온도를 높여 주고, 바위에 새로운 못 하나를 박아 준다. 그리하여 미래의 어느 날 다시 그 바위산에 오를 누군가는 몇 미터, 또는 몇 백 미터 더 높은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위에서 단 한 방울의 아가페라도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아가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죽지 않으며, 매일 아침 삶은 다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출처: https://eoc-rg.tistory.com/4 [EoC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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