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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 위기에 처한 경제와 덕德 4

다음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로마 룸사 대학 경제학과)가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에 경제와 덕德에 대해 주제별로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이태리어 원본 제목은 Fidarsi di uno sconosciuto)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4장 신중함 _ 면역된 연대성


아담 스미스는, 국가들의 발전과 부유함은 인색吝嗇함의 악습이나, 이기주의의 서글픈 갈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추덕四樞德, 곧 ‘네 가지 중요한 덕목德目 virtù cardinale’ 중에 하나인 ‘신중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설득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중함이란 “개개인의 재화와 지위, 그리고 평판을 잘 돌보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버지(또는 어머니)가 자신의 재산을 잘 관리, 유지하고 늘리며, 성인成人이 된 아들에게 자동차를 선사하면서, “부탁인데, 이 차를 잘 관리하렴.” 하고 말한다면 그 좋은 아버지(또는 어머니)는 신중한 것이다.


‘신중함’의 덕을 우리의 농경문화와 수공업문화의 뿌리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농경문화와 수공업문화에서는 재화를 아껴서 적절히 사용하고, 적은 물품이나마 잘 관리하며, 재산과 꿈, 삶의 프로젝트들을 신중하게 늘려 나가도록 교육받곤 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신중함에 반대되는, 악습에 따른 행동들이란 자신의 재화를 (또는 부모의 재화를) 마구 써버리는 사람의 낭비와 부주의, 어리석음임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우리의 안녕과 복지는 우리와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의 덕德에도 달려 있음을 다시 되새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곧, 이웃집에서 자기네 정원을 관리하는지 여부와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의 방법에도, 그 이웃이 세금을 내는지 여부와 어떤 식으로 내는지의 방법에도 달려 있음을, 고객들의 덕德이나 공공행정public administration 기관의 덕에도 달려 있음을 말이다.


개개인의 신중함이 공공의 덕德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계몽주의 초기의 그 낙관론은 오래 가지 못했다(비록 아직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그것을 관념적으로, 또는 순진하게 주창하고 있지만 말이다). 근대성modernity이 동틀 무렵, 시장경제에서 사람들이 지닌 이기주의와 악습들은 사회적 안녕과 복지를 향해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들이 있었다. 또한 이 악습들은 “인간사회에서 그것들을 좋은 관습들로 바꾸고자 존재하는 인간”의 악습이기에 발전과 진보를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적私的인 악습들은 (새롭게 등장한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보의 넘치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너무도 많은 패자敗者들을 남겨두곤 했고, ‘섭리’는 파드론 은토니Padron ’Ntoni의 난파선難破船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기대하던, 진심으로 간절히 원했던, ‘상호 이익을 주는 조화로운 시장경제’라는 것이 실제로는 ‘자본주의’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권력 구조는 새로운 형태의 봉건주의, 새로운 불평등, 새로운 소득, 예전의 귀족 혈통과 다르긴 하지만 그 효력은 덜하지 않은 혈통과 가문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귀족들을 다시 창출하고 있었다. 불평등을 강화하는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들의 내부에서 개개인의 신중함을 실천하지 않을 때, 결국 좋은 삶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런 은행, 기업에서 바로 경제의 가장 중요한 과정들이 전개되곤 한다는 것이다.


신중한 사람에게는 덕德이라는 기준에 따라 그 자신의 삶과 자기 가족의 삶의 방향을 정할 것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법과 여러 조직구조들이 바뀌도록 작용하고 행동할 것도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기업의 거버넌스governance 공공경영 시스템과 많은 ‘공유재共有財’들의 시스템이 바뀌도록 노력할 것도 요구되는 것이다.


악습에 물든 기관 안에서 살고 있는, 덕성德性을 갖춘 어떤 사람이 진정 신중함의 덕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기 위해서는 신중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과, 자신의 이익과 재산, 심지어 자신의 애정을 돌보는 것을 부차적副次的인 것으로 돌릴 줄 알아야 한다.


만일 명백한 불의와 비리非理를 고발하고자 하는, 또 고발해야 하는 사람이 공갈과 보복의 위협 앞에서 <신중하게> 입을 다문다면, 그는 우리가 덕德이라고 부르는, 그 신중함의 측면을 살지 않는 셈이다. 덕목德目들의 가치와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덕목들의 역설적인 본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덕德은 그 자체로서 죽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자체를 <넘어서는> 더욱 큰 무언가를 향해 열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참으로 덕스럽다고 할 것이다. 이는 한 덕목이 다른 실제의 덕목들, 또는 ‘추정되는 다른 덕목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신중함은 신중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신중함이다. 강인함은 온유한 약함이 될 줄 알 때 신중한 강인함이다. 그리고 모든 덕德은 아가페agape로 꽃피어 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사실, 우리가 만일 이 결정적인 역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덕德은 가장 큰 악습으로 바뀌고 만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이득과 개인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덕목이 그 덕목 자체를 초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덕목의 참된 본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제를 부여한다.


만일 간디가 덕성스럽게 경솔하지 않았더라면, 인도를 해방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도 경솔하게 나환자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형제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면역된 연대성’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노숙자들을 끌어안아 주고자 했고, 끌어안아 줄 줄 알았던, ‘아가페’적的으로 경솔한 사람들과 이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들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새로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면역된 연대성’은 현재 우리의 경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행태인데, 불행히도 우리의 비영리단체들 중 일부도 그러하다.


덕목들에 지정된 경계선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경솔함을 누군가 지닐 때마다, 덕德의 영역은 - 곧 ‘인간성’의 영역은 - 확장되고 인간다워진다. 이는 거저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몸소 직접 값을 치르면서 가능해진다. ‘복된 경솔함’들이 문명을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며 이 세상을 살 만한 곳,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해 준다.


출처: https://eoc-rg.tistory.com/5 [EoC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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