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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 위기에 처한 경제와 덕德 5


다음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로마 룸사 대학 경제학과)가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에 경제와 덕德에 대해 주제별로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이태리어 원본 제목은 Fidarsi di uno sconosciuto)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5장 정의 _ 불공평을 넘어


사악한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내면 깊이 느끼는 정의감正義感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감과, 온갖 불의가 일반화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 인간의 공동생활이 영위되는 모든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정의’의 영역도 확장되고 있다. ‘정의正義’가 요구하는 바에, 잘못된 방식으로 부응하는 모습 중에 하나는, 모든 사회생활을 ‘법률화’하여 법의 틀 안에만 가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들을 가능한 한 성문화成文化함으로써, 모든 인간관계를 일종의 ‘계약’처럼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다. 이는 오늘날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경향 내지 유혹은 정의正義를 강화하기보다는, 우리의 학교와 공동주택과 병원을 상호 불신의 함정에 빠지는 장소가 되어버리게 하고 있다. 다양한 모습의 인간관계를 계약의 형식에만 맞추어 가려고 할 때, 인간관계는 부자연스러워지고 변질되기 때문이다.


정의正義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지속적인 훈련의 결실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실존’하는 다른 위대한 덕성德性들이 그러하듯이, 정의正義는 원칙으로 제시되거나, 의거依據 기준으로 선포되기에 앞서서, 먼저 실천되고, 추구되며, 함양涵養되어야 하며, 삶으로 생활화되어야 한다.


도시의 정의正義는, 시민들의 정의로부터 태어난다. 이는 그리스 신화가 폴리스polis의 ‘정의正義의 여신’ 디케Dike를 테미스Themis라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나게 한 데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테미스는 다른 어떤 법적 체제나 역사적, 구체적인 시스템보다도 앞서는 ‘정의正義의 화신’으로서, 누구든 이 여신을 따르기만 하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는 여신이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테미스는 디케와 갈등관계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 일례로 ‘폴리스의 정의’에 반대되는 행위인 줄 알면서도, 죽은 오빠 폴리네이케스Polyneices를 ‘보다 큰 정의正義’의 이유로 매장해 준 안티고네Antigone의 크나큰 비극을 들 수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Pharisee들에게도 자기들 나름의 정의正義가 있었고, 바로 그들의 정의正義의 잣대를 근거로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아 유죄판결을 해 버렸던 것이다. 그 어떤 정의를 내세운다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의로운 사람들을 억누르고 늘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의롭지 못한 백성들이 내세우는 정의라면, 그런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테미스Themis의 정의에 거슬러 디케Dike의 정의를 이용하려는 이들이다.

사실 ‘정의正義의 덕德’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시민들이 없다면, 불의不義한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법률은 불의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 정부의 형태가 민주적일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불의不義한 법률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필란지에리Filangieri가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먼저 덕성德性을 갖춘 시민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바로 민주주의가 지닌 주된 취약점이라고 하겠다.


‘정의正義의 덕德’을 선포하는 일은 여러 방식의 가능성에로 열려 있는 것이고, 또한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곧,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인정해 주고 돌려주라고 우리에게 제안하되, 그 ‘각자의 몫’을 어떻게 가늠하고 정할지, 또 누가 그것을 정해야 할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디케Dike의 정의正義’가 그 「각자의 몫」이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그 내용과 한계를 정해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더욱 사실인 점은, ‘정의正義의 덕德’이 갖는 불확정성不確定性이 바로 이 덕德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덕德이라는 것을 표현해 준다는 점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에 공동의 소속감이 존재한다면, 또 존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그가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정당한 권리를 인정해 주고 배려해 주게 된다. 왜냐하면 이때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은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며, 나와 관련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에게 제삼자第三者, 삼인칭三人稱이지만, 보다 깊은 차원에서는 이인칭二人稱, 나의 ‘상대방 (‘너’)이라는 단지 그 점 때문이다.


그리고 ‘디케Dike의 정의正義’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데에 반해, ‘정의正義의 덕德’은 ‘각자의 몫’에 대한 계산을 초월한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의와, 율법학자와 바리사의의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이 바로 ‘아가페’라는 것을 말해 주었는데, 아가페는 정의正義가 끝날 때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正義의 완성이자 그 전형典型이다.


인도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야 센Amartya Sen과 몇몇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경제학은 정의正義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라는 ‘이념 내지 종교’에서 정의正義는 도달해야 할 목표라기보다는, 존중해야 할 구속력 있는 의무 사항들에 속한다. 정의라는 말은 기껏해야 근로조건이나 환경보호, 또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법으로 규정해 놓은 사항들에 대한 강제된 존중’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거나 ‘세금납부’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닐 뿐이다. 어떤 의무 사항이든, 자본주의 기업의 유일하고 진정한 목표, 곧 이윤profit을 극대화하는 것, 더 정확하고 심각하게 표현하자면, 이자소득 내지 지대地代 등 불로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제약을 가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정의로운 가격”은 중세 경제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였다. 안토니오 제노베시Antonio Genovesi는 자신의 경제학 논문 『시민경제학 강의』와 나란히 1766년 정의正義에 관한 논문 『디체오시나Diceosina』를 썼는데, 이는 경제와 윤리에 관한 자신의 모든 작업의 영혼이 담긴 논문이었다. 우리의 자본주의가 인식하고 있는 정의正義란 - 정의를 인식하기는 한다면 -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의의 정의와 유사한 것으로, 의무 사항과도 같은 정의, 형식적이고 문화적으로만 법을 존중하는 정의이다. 정의에 대한 물음은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 전반에 관한 물음이고 그 전반을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한쪽으로 제쳐두었던 물음이기도 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비평적인 사고思考 능력의 위기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의 <금융자본주의financial capitalism>와 <정의正義>라는 중요한 덕목德目 사이에는 매우 깊고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매일의 경제생활에서 정의正義의 덕德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거대은행과 보험사, 다국적기업 소유주들이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데에 기초를 둔 시스템은, 윤리체계로서 정의正義의 덕德이 요구하는 것과는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너무도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이자소득과 특권을 계속 만들어내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업과 소외를 지속적으로 가져오는 자본주의, 그처럼 특권을 강화하는 법을 제정하고, 출발선상에서부터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불리한 법을 만드는 이러한 자본주의는 정의의 편이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효율성에나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이따금씩 가능할 때만 말이다.


우리가 이런 발전 모델을 극복하고 결정적으로 정의正義의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유럽의 협동조합운동을 태어나게 한 사람들이 지녔던 시민적 용기와 사고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유럽의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지금과는 다른 노선을 시장과 기업에 제시해 보고자 했다. 이 때문에 소유에 대한 권리 문제, (오늘날 경제학 책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주제인) 소득의 분배 문제, 권력의 문제, 경제 주체들 간間 기회의 평등이라는 문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했다. 그러면서도 자유를 부정하거나 시장市場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의 역사는, 우리의 악습과 우리가 지닌 얼마 안 되는 덕성德性을 본질적으로 반영해 주는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는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다른 모습으로 진화될 수도 있다. 불의와 불공정은 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지속적으로 주름잡고 있는 공연과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특권과 현행 자본주의의 옳지 못한 편리함에 이미 익숙해져 있으며,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선택들을 통해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아직 너무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다른 몇몇 사람들은 명백하게 드러난 여러 크나큰 불의가 우리 사회에서 제거될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하고 말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러한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출처: https://eoc-rg.tistory.com/6 [EoC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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