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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의 기름 부음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요엘 예언서 3장 1절)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에 대한 기름 부음 역시 평범한 일상 중에 이루어진다. 사울은 그 당시의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수단이었던 동물인 나귀들이 사라져 버리자, 집을 떠나 나귀들을 찾아 나섰다. 이런 일상적인 노동의 일부로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갑자기 특별한 사건이 그의 삶 안으로 불쑥 들어오게 된다. 사울은 일하러 길을 떠났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는 ‘주님께로부터 기름 부은 자’가 되어 있었다. 잃은 나귀들을 찾아 떠났던 것이었는데, 그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성소를, 소임을, 곧 운명을 찾은 것이었다.

이는 뜻밖에 만난 행운에 대해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에피소드 중에 하나로서, 이는 말로써는 설명이 되지 않는데, 단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서점에 가서 사려고 하는 책 옆에 꽂혀 있는 책을 우연히 보다가, 이 책이 원래 찾던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가 몸소 서점에 직접 찾아가지 않고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영성 생활의 가장 심오한 논리를 무언가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구입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이 같은 소중한 자산이 존재한다는 것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같은 소중한 자산은 단지 우리가 사랑받기 때문에 거저 받게 되는 것일 뿐이다.

[벤야민 지파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키스였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고 츠로르의 손자이며, 브코랏의 증손이고 아피아의 현손이었다.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 사울은 함께 가던 종에게 말하였다. “그만 돌아가자.”

그러자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성읍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한 분 살고 계십니다. 그분은 존경받는 분이신데,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거기에 한번 가 보십시다. 혹시 그분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실지도 모릅니다.”] (사무엘기 상권 9장, 1절-6절)

사울은 강하고, 가장 잘생겼고, 키가 가장 커서, 이 같은 외모 때문에도 선택받았지만,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에 속했다. 그 지파는 기브아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끔찍한 범죄 중에 하나를 저지르기도 했다. (판관기 19장) 이 양면성은 사울의 운명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사울은 종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종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간다면 그분에게 무엇을 가지고 가야겠느냐? 자루에는 빵도 떨어지고, 그 하느님의 사람에게 갖다 드릴 예물이 하나도 없구나. 우리에게 뭐 남은 것이 없느냐?” 그러자 종이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저에게 은 사분의 일 세켈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드리면, 그분이 우리에게 갈 길을 일러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9장, 7절-8절)

이 사무엘서의 첫 부분에서 다시 ‘선물’이라는 크나큰 주제가 지닌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여기서 사울이 걱정하는 ‘선물’은 무상성無償性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받은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매우 더 가깝다고 하겠다. 선물과 교환의 영역은 항상 서로 교차되어 왔고, 때로는 겹치기까지도 했다. 무상적無償的이고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이란 것은, 거의 항상 학자들의 책에나 존재하거나, 혹은 어린 시절의 소중하고 영원한 기억들이 보관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의 한쪽 귀퉁이에나 존재하는, 최근에 고안해낸 개념이다. 현실의 삶에서 ‘선물’이란 상호성을 나타내는 첫 번째 상징적인 의미이고,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무관심(관심의 결여)은 ‘선물’에 대한 의미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그 선물의 특성이 드러난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하느님께 문의하러 가는 사람은 “선견자에게 가 보자!”고 하였다. 오늘날의 예언자를 옛날에는 선견자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무엘기 상권 9장, 9절)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기까지 오랜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이로 인해 그 과정은 복잡하고도 양면성을 지닌 것이었다. 선견자, 무당, 점쟁이 등은 고대 시대에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병을 치료하거나 꿈을 해석해 주었고, 암호를 해독해 주거나, 악령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며,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거나, 왕에게 조언을 해 주는 등 다양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곤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하게 자신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성한 장소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런 선견자들에게는 봉헌이나 선물로 지불하곤 했다. 이것이 상업적인 용어보다 더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있는데, 고대의 사람들은 신성한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될 때, 그 특별한 상호이행(相互履行, 라틴어로 do ut des)의 거래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물건을 서로 맞교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지불’한 것보다 받는 것이 (혹은 받은 것이)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죽은 이를 위해 봉헌하는 미사 예물로 사제에게 ‘지불’하는 10유로가 그 미사의 가치와 견줄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선물로 내어주는 것이 (돈으로 ‘지불’받는 것보다) 더 큰 경우는 현재,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매우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 달간 우리 회사에 주는 것은 우리가 받는 월급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에서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의 선견자나 점쟁이가 표상表象하는 것에서부터 점차 발전하여, 독특하고 특별한 현상이 되었다. 사무엘은 아직 고대의 선견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사무엘 안에는 수세기 후에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를 태어나게 할, 그 새로운 ‘예언’이라는 현상의 씨앗도 보인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갔을 때 ‘선견자’에게 돈으로 지불을 했다는 그 어떤 언급도 사라진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곧, 이 선견자 내지 예언자와의 관계에는 점쟁이들과 했던 선물 - 교환과는 다르고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그들이 만난다. [(그들은 성읍으로 올라갔다.) 성읍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마침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나오다가 그들과 마주쳤다.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주님께서는 사무엘의 귀를 열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일 이맘때에 벤야민 땅에서 온 사람을 너에게 보낼 터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사무엘기 상권 9장 14절-16절)

여기서 사무엘과 선견자의 본질적인 차이를 알 수 있다. 야훼(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의 귀에다 말씀하셨다. 새로운 예언의 시대는 의미의 변화로 시작된다. 보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옮겨 간다. 선견자는 ‘보고’, 예언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느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예언으로써 조상들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은 이제 ‘목소리’가 된다. 다른 민족들과 비슷하게 구름, 불 등 고대에 하느님의 출현을 나타내던 상징들은 이제 점차 목소리로 대체된다. 오늘날의 우리는 너무 많은 목소리와 볼 것들에 묻혀 더 이상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는 계속해서 우리를 사로잡고 감동시키는, 그 무언가 놀라운 것으로서, 때로는 기도로 승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 다른 목소리’를 듣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우리에게 그것을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 줄까?

사무엘은 두 번째로 ‘예언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게 된다.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사무엘기 상권 9,17)

그러고 나서 사무엘은 사울을 식사에 초대하여 상을 차려 주는데, 잡은 동물의 가장 살지고 기름기가 많은 부위를 남겨 두었다가 대접한 것이다. (9,24)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동틀 무렵 (…) 사울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울과 사무엘은 둘이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성읍 끝까지 내려갔을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더러 우리보다 앞서 가라고 이르시오. 종이 앞서 가고 나면, 당신은 잠시 서 계시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겠소.”] (9,26-27)

(시내 중심가가 아닌) 성읍 변두리에서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10,1)

변두리 동네에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는 과정을 둘러싼 배경에서 드러나는 이와 같은 평범함은 매우 아름답다. 나귀들, 종, 점심 식사, 변두리의 거리 등과 같이 별도의 신성한 장소가 아닌, 평범하고 일반적인 주변 환경 속에서 이 특별한 장면이 전개되도록 함으로써, 마치 성경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대해, 이 같은 방식으로 답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모세와 기드온, 아모스, 갈릴래아의 어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나자렛의 마리아도 마찬가지의 방식을 체험하게 되는데,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것은, 자신의 집에서 아마도 일상적인 집안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던 중간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출현을 위해서는, 배 한 척, 부엌, 떨기나무 한 그루, 나귀들을 되찾아 집에 데려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없다. 밤에 걸어서 건너는 강물의 한 지점보다, 사막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거리보다, 아시시의 허물어져 가는 한 작은 성당보다 하느님께서 나타나시기에 더 적합한 장소는 없다.

사울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기브아에서 [예언자의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영이 사울에게 들이닥쳐, 그도 그들 가운데에서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였다. 사울을 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언자들과 함께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는 것을 보고, “키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사무엘 상권 10,10-11)

사울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천 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성령 강림과 비슷한 놀라운 예언적 체험을 한다(사도행전 2,13). 그리고 장차 천 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이라고) 몇몇은 빈정거리게 되는 것처럼, 기브아에서도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사울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성경 본문은 그 구절 바로 앞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이 몸을 돌려 사무엘을 떠나가려는데, 하느님께서 사울의 마음을 바꾸어 주셨다.] (사무엘 상권 10,9)

사무엘과의 만남과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점이, 사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바꿔 놓은 것이다. 곧, 사울의 마음을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지 어떤 느낌이나 감동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바꾸어 놓은 그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성경에서는 마음으로부터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할 때, 해당 인물들로 하여금 예언자적인 영감을 받아 예언하게 한다. 곧, 그 마음속에 예언자적인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예언자적인 소명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인본주의에서는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있는 인간의 상태인 것이다. 이 점은 성경이 예언자들을 높이 본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 모두가 다 예언자인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영혼의 귀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성소聖召를 지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언자의 목소리에, 또 생명의 목소리에 열려 있다면, 우리 중 많은 이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번은 예언적인 열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결혼식 날이나, 마침내 진정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는 날, 또는 그녀가 떠나던 날, 우리는 그것이 전부, 그리고 오직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 영혼의 열정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는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영원을 느끼는 순간이다.

사울의 그 체험도 길게 가지 않았다. [사울은 이렇게 신이 들렸다가 풀려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사무엘 상권 10,13 공동번역 성서) 또는 [예언이 끝나자 사울은 산당으로 갔다.] (사무엘 상권 10,13 새 번역 성경)

그러나 성경은 그 짧고 놀라운 장면을 잘 간직한다. 이는 사울이 했던 예언자적인 체험이,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그 놀라운 ‘예언자들의 무리’와 어울려 함께 걷는 환상적인 체험을 하기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그저 직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수도 있지만, 변두리에 가서 우리의 소명, 소임, 운명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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